태평행 - 02

“참 너도 걱정이로다. 왜 꾸지람을 안 듣도록 좀 몸을 단정히 못 가지느냐.”
“누님 걱정 마세요. 여편네들한테 꾸지람 듣는 것은 무섭질 않으니깐.”
허세(虛勢)로도 볼 수 있고 빈정거리는 말로도 볼 수 있는 이 말에 현숙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을 보고 일성이는 웃었다. 잘게 생긴 앞니가 전등에 반사하여 유난히 반짝였다.
“왜 눈살을 지세요? ― 대체 여편네란 사내를 모욕하는 것을 제일 통쾌하게 생각치 않아요?”
그리고는 대답을 요구하는 듯이 현숙이와 영옥이를 한 번 번갈아 보았다.
현숙이는 대답치 않았다. 영옥이는 신문 뒷면을 뒤지었다.
“네? 안 그래요?”
“듣기 싫다. 좀 철이 들어라.”
“하하하하.”
잘게 생긴 일성이의 앞니가 또 전등불에 반짝였다.
이러한 가운데서 현숙이는 머리 속에 일어나는 일종의 혼란(混亂)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손아래 동생, 자기가 책망 한 마디만 하면 머리를 긁고 얼굴을 붉힐 줄만 알았던 일성이에게서 현숙이는 어딘지 모를 일종의 ‘힘’을 보았다. 그리고 그 ‘힘’은 불행히 현숙이의 지식과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었다. 그것은 동생이라 하는 말 아래 숨어 있는 억센 사나이의 그림자였다. 예의를 예의로써 대하고 무례를 예의로써 물리칠 줄밖에는 모르는 현숙이의 상식으로써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는 손위 동생.
예외도 없었다. 경우도 없었다.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온갖 것은 그의 앞에서는 그 존재를 잃을 것이었었다.
그 앞에 당면한 현숙이는 아직껏의 제 인생관과 사회관과 거기서 자연히 생겨 난 처세술에 아직 더 수정을 하고 개방을 하여야겠다는 필요를 느낄 유여도 없이 먼저 그 억셈을 경멸하였다. 그 경멸에는 미움도 섞였다. 똑똑히 지각은 못하였지만 공포(恐怖)조차 섞여 있었다. 일성이의 반짝이는 이빨이 현숙이에게 몹시 불유쾌하게 보였다.
참 이제 이 집에 오는 “ 길에 이런 일이 있었지요. 저 앞에 수도를 고치느라고 구렁을 파지 않았어요? 그리고 거기는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나무를 하나 걸쳐 논 뿐이지요? 거기까지 와서 막 건너가다 보니깐 저편 쪽에서 여학생이 하나 건너오랍디다그려. 그래서 첨에는 내가 양보를 할까 했지만 그러나 사내가 한 번 냅딘 발을 어떻게 도로 옴쳐요? 더구나 내가 그 다리 위에 발을 먼저 올려놓은 이상에야 말야요. 그래서 막 건너가는데 그 여학생은 퍽 근시안인지 혹은 자기가 건너오면 내가 도로 물러가리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당당히 건너옵니다그려. 가운데서 딱 만났지요. 누님, 여편네란 건 그런 게야요? 거기서 딱 버티고 서더니 나를 쳐다보겠지요. 아마 도로 물러가라는 뜻인가 봐요. 꼴이 미워서 나도 딱 마주 버티고 있었구료. 그러니깐 용서하세요 하더니 한 발을 내놓습디다그려. 그래서 어서 가시지요 하고 그냥 서 있으니깐 또 한번 용서하라고 그래요. 너무 어이없고 미워 칵 붙안아서 이편으로 옮겨놓아 주고 말았지요. 혹은 그 ― 옮겨 놓을 때에 어떻게 내 뺨이 궐의 뺨에 건드렸는지도 몰라요. 그랬더니 홱 돌아서면서 내 뺨을 딱 하고 휘갈깁디다그려. 누님 그게 예의야요? 여편네란 사내를 모욕하는 것을 제일 통쾌하게 알 테요. 아마 궐은 인제 한 달 동안은 그 이야기를 자랑하러 돌아다닐걸요.”
그런 뒤에 일성이는 또 한번 하하하 하고 웃었다.
그 이야기에 부러 대척치 않은 현숙이는 영옥이에게 향하였다.
“내일 자수 강습회에 갈 테요?”
영옥이는 겨우 신문을 놓았다.
“가잖구요. 언니는?”
“나? 나는 그만둘까봐.”
“왜요?”
“사랑방도 좀 치워야겠고 ―.”
“그게야 아침에 잠깐 다녀와선들 ― 가세요.”
“글쎄.”
일성이의 이야기에 대척치 않으려 이야기를 꺼낼 뿐 특별한 목적이며 뜻이 없었던 현숙이는 이만치로 이야기를 끝을 내었다.
그 이야기의 뒤를 일성이가 받고 일어섰다.
“영옥 씨, 자수 강습에 다니세요?”
“네.”
영옥이는 간단히 대답하였다.
“불란서 자수예요?”
“네.”
“누님도 다시니구요?”
“그래.”
“그럼 누님, 넥타이에 수나 하나 놓아 주시구료.”
이런 뒤에 자기의 수놓은 넥타이를 끌어내어 내려다보던 일성이는 갑자기 제 넥타이의 내력을 자랑할 생각이 난 모양이었었다.
“누님, 이 넥타이 어때요?”
현숙이는 힐끗 볼 뿐 대답치 않았다. 일성이는 이번에는 영옥이에게 향하였다.
“영옥 씨, 어떻습니까?”
자랑하는 듯이 내어보이는 그 넥타이에 대하여 탄상자의 지위에 서지 않을 수 없은 영옥이는 좋습니다고 하였다.
“중국 모던 걸이 수놓은 게야요.”
하면서 일성이는 보아 달라는 듯이 앞으로 내어밀었다. 듣고 보니 어딘지는 모를 지나 색채가 있는 듯하였다.
“조선도 모던 걸이 꽤 생겼지요? 하지만 중국 모던 걸만은 못해요. 조선서는 모던을 일본을 거쳐서 수입하는데 중국서는 직수입을 하니까요. 그만치 ― 조선보다 한층 더 앞선 만치 사내를 업수이 여기는 도수도 더하지요.
쩍하면 구두를 신겨 달라고 발을 앞으로 내어밉니다그려.”
“그러면 너 같은 모던 보이는 그 신을 신겨 준 뒤에는 그것을 자랑하러 돌아다니더냐?”
이것은 농담이라기에는 너무 독한 험구였겠다. 그러나 일성이에게 대한 어떤 불유쾌한 반감은 현숙이로 하여금 아무 비판이 없이 이런 말을 하게 한 것이었었다.
영옥이가 얼른 신문을 도로 들었다. 일성이도 고소하였다.
“보구료. 누님도 남자를 모욕하는 것으로 재미를 삼지 않나.”
일성이는 아직껏 여자에게 하던 빈정거림은 온전히 생각도 안하는 듯 싶었다.
“그럼 네가 아직껏 여자에게 대해서 하던 말은 무에냐? 그건 여자를 모욕하는 게 아니냐?”
“나요? 그게야 사실을 예를 든 뿐이지.”
“그만둬라. 영옥 씨가 속으로 욕할라.”
“영옥 씨가요? 영옥 씨, 절 속으로 욕하세요? 그러진 않으시겠지요.”
하면서 일성이는 영옥이를 들여다보았다. 영옥이는 얼굴이 새빨갛게 되었다.
“천만에.”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세요. 어딜 욕을 하신다구.”
“영옥이도 네가 흉보는 그 ‘여자’의 한 사람이다.”
“아 그렇던가? 그럼 전부 취소할까요?”
일성이는 머리를 긁었다.
일성이의 지식은 광범(廣汎)하였다. 그러나 그 지식은 조잡(粗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