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행 - 03

계통과 순서와 숫자가 없었다. 그만치 어떤 편으로 보아서는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고도 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그의 생활과 환경과 성격이 낳은 바 결과였었다. 목숨 있는 인형과 같이 아무런 일에도 간섭치 않고 지내는 어머니의 아래서 다른 감독자는 없이 자란 일성이는 그의 인생관과 지식을 온전히 다른 곳에서 얻지 않으면 안 될 자리에 있었다. 그럴 때는 손쉽게 그의 사면에는 불량소년이라 하는 떼가 있었다. 그는 거기서 지식과 인생관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있지만 가정의 정이라는 것이 없는 이 소년은 집을 모르고 방랑 생활을 하였다. 활동사진과 연극은 이 소년의 커다란 오락이요 위안처였으며 겸하여 지식의 근원이 하나이었었다. 사회와는 온전히 틈을 그어 놓은 부랑소년의 축에 섞여서 사회를 바라볼 때에 이러한 방관자(傍觀者)로서야 볼 수 있는 사회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비판도 이 소년의 지식의 하나이었었다. 그것의 부산물인 역관적 사회관(逆觀的 社會觀)도 그의 지식을 활약케 하는 한 힘이 되었다. 사회의 학대와 멸시는 이 소년의 마음을 더욱 비꼬아지게 하는 반면에 더욱 단련시키는 풀무불이 되었다.
게다가 이 소년에게는 천성에 타고난 화술(話術)과 그 변설을 더욱 빛나게 하는 그 독특한 역관적 사회관과 거기 어울리는 아름다운 눈과 앞니 (몹시 반짝이는)가 있었다. 더구나 무기 위에는 사회의 학대의 필연적 결과로서 생겨 난 반역심과 그 반역심을 행동화(行動化)할 수 있을 만한 침착과, 그 침착을 돕는 포학성(暴虐性)이 있었다. 부드럽게도 굳게도 아름답게도 또는 무섭게도 마음대로 변할 수 있는 그 무기는 영리한 그의 마음의 깊은 속에 숨어 있어서 주인의 나오라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필요에 응해서 그 무기를 때때로 꺼내어 쓰면서 사회와 병행하여 헤엄쳐 나아가던 그는 문득 여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그 무기는 용서없이 여인의 위에 내렸다.
혹은 아름답게 혹은 무섭게 마음대로 변할 수 있는 그 무기는 많은 여성을 정복하고 혹은 유혹하는 데 그를 도왔다. 여성에서 여성으로 혹은 제 미모를 이용하여 혹은 공갈로 혹은 변설로 많은 여성을 접하는 동안에 그의 고약한 지혜와 지식은 더욱 늘었다.
이러한 스무 살이라 하는 열성의 나이는 영리한 현숙이로도 능히 해석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는 수수께끼였었다. 어린애와 같은 천진한 웃음을 웃는 한편으로는 때때로 억센 그림자가 걸핏걸핏 보이는 것을 현숙이는 기괴한 마음상으로 바라보았다. 그 가운데는 예기하였던 바와 어그러지는 데 대한 불만도 있었다. 모반함을 받은 듯한 노여움도 있었다. 웃동생으로서의 위신이 차차 사라져 가는 듯한 현상에 대한 분만(憤懣)도 있었다. 자존심을 상한 듯한 불유쾌함도 있었다.
이러한 기분 아래서 일성이의 이야기를 억누르려고 때때로 독설을 하는 현숙이는 그 독설이 여자로서는 굳게 삼갈 것이라고 아직껏 지켜 온 그 교양도 잊었다. 자기는 웃동생이라는 지위에 대한 자각까지 엷어졌다. 그리고 그는 점잖지 못하게 동생과 말다툼을 하여 이기려 하는 철없는 자기를 발견하였다.
일성이는 몹시 이야기를 즐겨하는 사람이었었다. 궤변(詭辯), 능변(能辯) ― 어느 편으로라도 붙일 수 있는 그의 이야기는 그의 일종의 사교술로까지 되어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이야기는 넘어갔다. 현숙이가 앨 써 누르려는 것은 그로 하여금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에든 그는 다 그 이야기에 자기의 판단과 의견을 붙이기를 잊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담화술이었었다. 현숙이에게 대한 반항도 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그 판단을 증명키 위하여 어떠한 예를 들기를 잊지 않았다. 그 든 바의 예는 대개가 그 독특의 것으로서 어떻게 보면 억지의 예라고까지 할 수 있으나 그는 그런 것은 기탄치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현숙이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조차 사양치 않았다. 이야기가 어떻게 하여 불량소년이라는 데 미쳤을 때였다.
일성이는 문득 영옥이에게 이렇게 물었다.―영옥 씨 세상에서 “ , 저를 불량소년이라는데 영옥 씨도 그렇게 보십니까?”
“천만에.”
얼굴이 새빨갛게 되며 영옥이는 이렇게 대답치 않을 수가 없었다. 일성이는 뒤를 쫓아왔다.
“그럼 저를 어떻게 보십니까? 한 번 속임없는 판단을 듣고 싶습니다.”
영옥이는 대답할 바를 몰랐다. 다만 엄지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긁으며 침을 한 번 삼킬 뿐이었었다.
“네? 아무런 말씀을 하셔도 탄하지 않겠읍니다. 말씀해 보세요.”
“그게야 ―.”
“네? 그게야 어때요?”
영옥이는 또 막혔다.
“네? 말씀해 보세요.”
이러한 추격전에 현숙이는 조정자로서 들어서지 않을 수가 없다.
“일성아, 예절을 알아라.”
“누님은 가만 계시오. 영옥 씨, 어떻습니까?”
“야 !”
현숙이는 눈으로 꾸짖으면서 다시 불렀다.
“왜 이래요. 이건 언론압박이요 뭐요? 남의 말에 가로 들어서 가지고.”
여기 대하여는 현숙이는 대답할 바를 몰랐다. 이러한 불법과 무례의 앞에 쓰는 대항책은 그는 아직 못 배운 것이었었다. 현숙이의 마음은 노여움으로 떨렸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이 위에 웃동생으로서의 위엄을 쓰려다가는 더 창피한 꼴을 보기는 명백한 사실이었었다. 이것을 청년의 혈기라고 용서할 만한 관대한 마음과 여유를 잃은 현숙이는 증오에 불붙는 눈으로 일성이를 바라보는 것으로 끊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기 대한 대책으로는 할 수 있는 대로 일성이의 이야기를 무시하는 것으로 유일의 방책을 삼으려 하였다.
그 뒤부터는 할 수 있는 대로 현숙이는 영옥이와 이야기를 하였다. 영옥이의 이야기가 끊어질 기회를 피하였다. 이리하여 일성이의 입을 봉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기회를 엿보아 가지고 어머님이 기다리시겠다는 것을 구실삼아 가지고 영옥이를 큰댁으로 올려보내었다. 일성이도 문밖까지 쫓아나와서 영옥이를 보냈다.
영옥 씨 혹은 오늘 저녁에 “ , 제가 실례된 일이 있을지라도 그다지 나쁘게 생각치 말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시 제 성미가 예절이라는 건 모르니깐요― 그럼 또 ―.”
“안녕히 계세요. 응 ― 언니 내일 강습회에서.”
이렇게 영옥이를 보낸 뒤에 남매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제각기 전투를 준비하면서 ―.
“누님 노하셌소?”
방 안에 들어오면서 일성이는 웃으며 이 말부터 물었다. 현숙이는 대답치 않았다.
“자미있는 작자인데 ― 누님, 어때요 내 교제술이?”
“용하더라. 기껏 경멸은 샀으리라.”
“경멸?”
일성이는 오히려 의외라는 얼굴을 하였다.
“좌우간 작자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겠읍니까? 어디 알아보세요.”
“극도로 나쁜 인상이야 주었지.”
“만세. 용하외다. 그게 내 목적이니깐.”
현숙이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얼굴을 하였다.
“여자에게는 초대면에 깊은 인상을 줘야 해요. 나쁜 인상이고 좋은 인상이고 간에 초대면에 기껏 깊은 인상을 박아 놓아야 합니다그려. 여자는 인상의 심천(深淺)은 절대로 변경 안하지만 선악(善惡)은 몇 번이라도 변경합니다그려. 인제 작자 ― 영옥이 말이외다 ― 영옥이를 언제 다시 만나서 그때 좀 내가 아롱아롱해 보구료. 그러기만 하면 아직껏 박혀 있던 나쁜 인상이 확 돌아와서 좋은 인상으로 되지 않나. 아마 전번에는 내가 이 어른을 잘못 봤었나 보다 하고 오히려 제가 미안해하지 않나? 그러니깐 좋고 나쁘고 간에 첫번에 깊이는 인상을 남겨 둬야 합니다그려. 깊게 남기기 위해서는 좋은 편보다 나쁜 편이 더 손쉽지 않아요? 그것도 작자들의 자존심을 꺾는다든가 수치를 준다든가 하면 모르지만….”
이 일성이의 말에 팔 분의 진리를 인정은 하였지만 ― 아니 인정하였으므로 현숙이는 더 불유쾌하여졌다.
“언제 영옥이와 다시 만날 기회를 지어만 주구료.”
현숙이는 거기 대답치 않았다. 그리고 한 걸음 내었다.
“대체 뭘 하러 상경했느냐? 의논하겠다는 것이 뭐냐?”
“참, 너절한 계집애 때문에 귀한 일을 잊을 뻔했군. 누님, 돈 좀 취해 주시오.”
“돈은 웬 돈이냐, 얼마 말이냐?”
“대체, 이 집 재산이 얼마나 됩니까?”
일성이는 대답키 전에 다른 문제를 꺼냈다.
“이 집 재산이야 내가 알겠니? 또 알기로서니 아직 어머님이 생존해 계셔서 모두 잡고 계시고 너희 형님부터가 매달 연구소에서 받는 월급으로 집안을 지탱해 나가는데 웬 여유가 있겠냐?”
동생에게 대한 불유쾌한 감정은 그로 하여금 이 집안의 재산 상태를 필요 이상 낮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게 하였다.
“그래도 필요가 있을 때는 큰댁에서 임시로 얻어올 수 있겠지요.”
“그건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 처남의 용돈까지는 안 대주리라.”
일성이는 고소하였다 ―.
“누님께도 가정을 살 비용을 얼마 맡아 둔 게 있겠지요.”
“좀야 있겠지.”
“대체 얼마나 맡아 두셨소?”
“너는 대체 얼마나 필요하냐?”
이러한 문답하에 일성이는 겨우 자기의 필요한 금액을 말하였다. 그리고 그 금액은 현숙이의 생각하였던 바와는 너무 액수가 틀리는 많은 돈으로서 현숙이도 그 금액에는 처음에는 자기의 귀를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