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행 - 05

숨이 허덕였다.
“누님, 성낸 얼굴이 제일 이쁘오. 용언 씨 앞에서도 늘 성을 내구료.”
현숙이는 하나 둘 셋 넷 속으로 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서른까지 셀 동안에도 그냥 성을 삭이지 못한 그는 서른하나 서른둘 또 세었다. 그리고 쉰한까지 센 뒤에 고즈너기 동생에게 명령하였다.
“사관으로 가라.”
“구백오십 원은?”
“가!”
“구백오십 원은?”
행랑 아범 불러서 집어내기 “ 전에 썩 가거라. 아직 철없는 애라고 마지막에는 별 소리가 다 나오는구나 ― 싫을 것 같으면 그 오십 원도 도로 두고 가라.”
일성이는 아직 쥐고 있던 소절수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
“이게요? 이게야 약조금이지요. 나머지는 언제 줄 테야요?”
“받을 재간만 있거든 받으려므나.”
“동생 하나 있는 것 너무 업수이 여기지 말우. 못쓴다우 ― 그리고 얼른 승낙해 버리는 게 당신께도 상책이겠소.”
마침내 일성이의 말에는 협박의 색채가 띠기 시작하였다. 혹은 이 협박을 하려고 부러 누이의 성을 돋우었는지도 모를 것이었었다.
“넌 나를 협박을 하느냐?”
“협박이야 무슨 협박이겠소. 남 듣기도 흉하게.”
“그럼 그게 무슨 말이냐?”
“그저 그렇단 말이지. 사람이 추어 내자면 흠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비단 당신뿐이 그렇단 말도 아니오.”
일성이의 태도는 차차 침착하여졌다. 그 침착한 가운데 현숙이는 무서운 폭력을 보았다. 마주 앉은 사람은 현숙이의 동생 일성이가 아니요 이전 학생 시대에 활동사진에서 본 일이 있는 한 협박자이었었다. 일성이의 얼굴이 유난히 이뻐보였다.
현숙이는 입술을 떨었다 ―.
“그래 내게 무슨 흠이 있단 말이냐. 말해 봐라. 내게 그래 그래 그래―”
현숙이는 자기의 지위와 교양을 모두 잃었다. 비상한 노력으로써 일성이에게 달려들려던 마음을 누른 것이 최대의 인내였었다. 얼굴의 피가 모두 눈에 모인 듯하였다.
일성이는 또 헤헤 웃었다.
“게다가 약속도 있고 ―.”
“그래 언제! 무슨 약속!”
“말해 볼까요?”
“말해라!”
“그럼 ―.”
일성이는 점잔을 빼는 듯이 기침을 한 번 기쳤다.
그렇지만 동생의 정의로서 “ 준다면 나도 받기도 쉽겠고 받은 뒤에도 마음도 편할 걸 왜 꼭 약속을 이행한다는 형식 아래에 주랴고 그러우?”
“난 그런 약속은 한 일이 없다.”
“없에요?”
“없어.”
“그럼 할 수 없지. 그럼 말하리다. 오 년 전 ―.”
이렇게 말하고 일성이는 제 말의 효과를 기다리는 듯이 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래.”
현숙이는 증오에 불붙는 눈으로 일성이를 바라볼 뿐이었었다. 일성이는 한마디 더 보태었다 ―.
“여름.”
“그래.”
그러나 이렇게 대답할 동안 현숙이의 얼굴빛이 좀 변하였다.
“봉천 송죽여관(松竹旅館)에서.”
만약 이 말을 최후의 거탄(巨彈)으로서 일성이가 던진 것이라면 일성이의 던진 탄환은 그 예상 이상으로 맞았다.
이 한 마디의 말은 명약 이상의 효력이 있었다.
현숙이는 허둥지둥 방바닥을 양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몸을 벽에 의지하였다. 거기도 아직 부족한 그는 머리까지 벽에 의지하였다.
“생각납니까? 생각 안 나면 끝까지 말하리까?”
일성이는 마치 쥐를 놀리는 고양이의 태도로 현숙이에게 대하였다.
그러나 현숙이는 거기도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일성이를 건너다볼 뿐이었었다. 그 눈에는 증오도 안 나타나 있었다. 무서움도 안 나타나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그 눈은 다만 눈을 감기가 귀찮아서 뜨고 있다는 것으로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일성이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미소하였다. 잘게 생긴 앞니가 옥과 같이 반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