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삼 분의 시간이 흘렀다. 현숙이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 마디씩 한 마디씩 똑똑히 하는 그 말은 일성에게뿐 아니라 현숙 자기에게도 뜻밖엣 말이었었다 ―. |
| “자, 이게 내 대답이다. 이것은 내 오라비 최일성이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협박자 부랑자에게 하는 말이다 ― 나는 역시 그런 약속은 한 일이 없다. 그러니깐 물론 거절한다. 그리고 이 집은 부랑자가 발을 들여놓을 집이 아니니깐 당장에 나가라.” |
| 순간 일성이의 얼굴은 다시 험하여졌다. |
| 그러나 곧 헤헤 웃었다 ―. |
| “그럼 오 년 전 여름 송죽여관에서 생긴 일을 서용언 씨한테다 이야기를 해도 좋습니까?” |
| “좋다!” |
| “그러면 최현숙이라는 여자의 일생이 망하게 될 터인데 그래도 좋습니까?” |
| “좋다!” |
| “누님 왜 그러시오. 그게 누님의 본의가 아닐 테지요? 할 수 없이 그렇게 대답했지 본의는 아니지요? 난 그렇게 압니다. 그리고 구백오십원은 승낙하신 걸로 봅니다.” |
| 현숙이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
| “구백오십 원은 여자의 손으로는 적지 않은 돈이야요. 그것도 나는 알아요. 그러니깐 오늘로 달라는 것도 아니외다. 사흘 후 ― 사흘도 부족할까― 넉넉히 잡아서 한 주일 뒤에 주세요. 어떻습니까?” |
| “―” |
| “주시겠지요? 네, 그럼 그러겠지요.” |
| 일성이는 말을 혼자 주고 혼자 받은 뒤에 벌떡 일어나서 제 모자를 집어 가지고 나갔다. |
| 현숙이에게는 한 가지의 비밀이 있었다. |
| 세상의 많은 비밀이 대개 두세 사람의 관여자가 있으며 더구나 남녀의 비밀에는 반드시 상대자라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나 현숙이의 비밀은 이 너른 세상에 자기 혼자 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현숙이는 굳게 믿고 있던 것이었었다. |
| 용언이와의 혼약이 성립된 뒤에 현숙이는 이 비밀을 곧 용언이에게 다 이야기하려 하였다. 그러나 차마 그때에 자백을 하지 못한 그는 그 뒤에 다시 자백을 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결혼을 하고 부부생활이 시작되어 오늘까지 이른 것이었었다. |
| 그 비밀이 ‘죄’라고 부를 성질의 것인지 어떤지는 현숙이는 몰랐다. 알고자도 아니하였다. 가장 사랑하는 남편에게 자기의 처녀를 바치지 못한다 하는 커다란 비극은 그로 하여금 그러한 사소한 문제를 생각하며 판단을 내릴는지를 잃게 한 것이었었다. |
| 그는 다만 자기의 잃어버린 정조 때문에 남몰래 고민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기다란 일생을 통하여 비밀히 하여야 할 자기의 임무(?) 때문에 고민하였다. 그보다도 또한 더욱 큰 고통은 자기와 남편의 새에 어떤 비밀이 누워 있다는 데서 나온 마음의 아픔이었었다. 어떠한 사소한 일이라도 남편을 속인다는 것과 남편에게 비밀을 가진다는 것을 불유쾌하게 생각하는 그가 여자의 생명인 정조 문제에 관하여 일생을 통하여 남편을 속인다는 것은 그에게는 과도한 짐이었다. |
| 그때에 돌발적으로 생긴 그 사건은 현숙이에게는 책임이 없을 성질의 사건이었었다. 상대자의 이름은커녕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도 그 사건이 현숙이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단이 된다. 따라서 그 사건은 완전한 비밀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건이었었다. 상대자는 상대자가 혼자서, 현숙이는 현숙이 혼자서 제각기 가지고 있는 절대적의 비밀이었었다. 이제 어떠한 자리에서 두 사람이 마주 선다 할지라도 그때의 그 사건의 관계자로서 서로 알아볼 수조차 없는지라 따라서 현숙이 혼자만 비밀히 하면 영구히 표면에 나타날 기회가 없는 사건이었다. 현숙이는 그것을 의심치 않고 믿었던 바였었다. 처음에 용언이의 혼약이 성립된 뒤에 그 비밀을 용언이 앞에 드러내어 놓으려던 그는 그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리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차차 용언이와 가까워 가면서 용언이가 자기의 처녀성을 절대로 시인하는 태도를 볼 때에 현숙이는 마침내 용언이 앞에 그 문제를 내어놓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종내 결혼식까지 거행되었다. 여기 미쳐서 현숙이는 방침을 바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녀간에 그 정조라는 것을 중대시하는 용언이의 성격도 현숙이로 하여금 그 방침을 바꾸는 동기에 큰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 너른 세상에 자기 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는 커다란 비밀을 일생을 저 혼자서만 알고 거기 대한 책임이며 고통을 저 혼자만 지려고 결심하였다. 남편과의 새에 어떤 비밀을 두고 그것을 일생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것은 현숙이의 성격으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커다란 고통에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사건을 남편에게까지 알게 하여 남편의 마음에 일생을 꺼림칙한 불유쾌한 생각의 그림자조차 띄어 주지 않으려 그는 결심하였다. 그리고 자기는 오로지 남편을 사랑하는 것으로써 사건의 속죄함을 받고 남편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써 그 고통의 위안을 삼으려 하였던 것이었었다. |
| 그것은 청천에 벽력과 같았다. |
| 이 뜻하지 않은 벽력에 맞고 정신을 잃고 있던 현숙이는 문득 그 자리에 쓰러졌다 마치 새암과 . 같이 눈물이 그의 눈에서 솟았다. 고요한 밤은 그의 울음을 더 도왔다. 발작적(發作的) 울음을 실컷 운 뒤에 그는 일어났다. 그리고 옷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씻은 뒤에 다시 소매에 넣고 문갑 앞에 가서 문갑을 의지하고 앉았다. 이제 운 그 울음은 얼마만치 그의 마음을 평정하게 하였다. |
| 당연한 순서로서 현숙이는 일성이에 대한 선후책을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생 방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허공 같은 그의 머리에는 끊임없이 커다란 무서운 그림자가 왕래할 뿐이었었다. 어떠한 일에든 그 처결을 주저한 일이 없고 판단을 그리친 일이 없는 현숙이로는 그 문제뿐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
| 천 원 ― 일성이의 청구하는 바의 이 돈을 주지 않으면 일성이는 오 년 전의 그 사건을 남편 용언이에게 다 말할 만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
| 현숙이는 오늘 처음으로 일성이를 알았다. 그리고 거기서 이야기 때 들은 바 제 아버지의 면목을 발견한 것이었었다. |
| 만약 그 사건이 남편의 귀에까지 가면? 현숙이는 ( )갑 위에 놓여 있는 용언이 의 사진을 끄을어당겼다. 현숙이가 만든 비단틀 속에 들어 있는 그 사진의 주인공은 온화한 눈으로 현숙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관대하고 온화한 가운데도 엄격함을 잃지 않는 그 사진의 얼굴은 오늘따라 무엇을 심문하는 듯이 현숙이를 바라본다. 현숙이는 그 사진의 눈을 피하면서 몸을 떨었다. |
| 관대한 남편은 혹은 그 사건을 알고라도 안해를 용서할지는 알 수 없다. |
| 그러나 그렇다고 사랑까지 계속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었었다. 한 걸음을 양보하여 사랑이 그냥 계속된다 할지라도 안해에게 대한 꺼림칙한 감정 뿐은 결코 그의 일생을 통하여 없어지지 않을 것이었었다. |
| 여기서 일어나는 남편의 경멸에 생각이 미칠 때에 현숙이는 뜻하지 않고 또 다시 몸을 떨었다. 그 생각의 그림자와 같이 그의 머리에는 일성이의 모양이 나타났다. 그림자의 일성이는 잘게 생긴 앞니를 내어놓고 씩씩 웃었다. 거기 향하여 현숙이는 증오에 불붙는 눈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
| “너는 무슨 권리로써 네 누이의 행복을 깨뜨리느냐!” |
| 현숙이는 그 그림자를 책망하였다. 그림자의 일성이는 그냥 웃음을 계속하였다 ―. |
| “아녜요 아녜요. 나야 내 행복을 위해서 그러지.” |
| 현숙이는 보이지 않는 총을 들어서 일성이를 쏘았다. 그러나 일성이는 그냥 뻣뻣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이 험상지게 되었다 ―. |
| “여보, 나만 죽이면 당신 비밀이 없어지는 줄 압니까? 비밀은 영구히 남아 있어요.” |
| 현숙이는 그 그림자를 지워 버리려고 눈을 다시 남편의 사진 위에 부었다. |
| 사진은 역시 온화한 눈으로 현숙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현숙이는 그 사진과 자신의 새에 있던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방해물이 박혀 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순전히 일성이에게 있는 것이었었다. |
| 즉 거대한 날개와 같이 천 원이라 하는 돈이 그의 머리를 내려눌렀다. 그리고 그 천 원이라는 돈의 저편 쪽으로 희미한 서광조차 보였다. |
| “천 원! 천 원!” |
| 현숙이는 그 사진틀 속에 천 원이 있는 것같이 그 사진을 흔들면서 고민하였다. |
| 그때에 문득 그는 자기의 형 인숙이가 생각났다. 가세가 그다지 부유하달 수는 없으나 홀몸으로서 한 집안을 주관하며 지내는 형에게는 그맛 돈은 있기도 쉬울 것이었었다. 현숙이는 형을 힘입으려 하였다. |
| 현숙이에게도 그만 돈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용언이가 현숙이에게 자유로 쓸 권리를 주어서 맡긴 금액은 일성이가 청구한 금액보다는 훨씬 많은 것이었었다. 그리고 용언이는 거기 대하여는 절대로 간섭치 않았다. 그런지라 거기서 일성이의 청구하는 바를 주어도 이후에 나타날 근심은 없었다. 그러나 남편에게 한 가지의 할 수 없는 비밀은 가졌을지언정 또 다시 남편을 추호만치라도 속인다는 것은 현숙이의 도덕감과 교양이 결코 허락하지 않는 바였다. |
| 이리하여 그는 시재 당한 급한 일을 끄기 위하여 제 형 인숙이를 힘입으려 하였다. |
| 이 생각은 순간에 그의 머리에 일어나서 순간에 결정되었다. 순간에 결정되니만치 그의 뇌리에서 근심의 자취를 쫓아내는 속도도 빨랐다. 그는 제 머리 속에서 가속도로 스러져 가는 근심의 자취를 관찰하는 흥미에 끄을리어서 그것이 성공될까 안 될까를 생각하여 볼 비판력조차 잃었다. |
| 그리고 사진틀을 양손으로 잡고 호소하듯이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
| 남편이 괴로울 때에는 그 피난처를 안해의 품안에서 구할 것이요 안해가 괴로울 때에는 그 피난처를 남편의 품안에서 구할 것이라는 것이 현숙이의 부부관이었었다 그리고 . 아직껏 그것을 지켜 왔다. 그러나 이번의 이 괴로움을 만나서 피난처로 남편의 품을 선택할 수 없는 경우에 이른 그는 거기 따르는 일종의 불만조차 느꼈다. 남편을 속이는 듯한 불유쾌함조차 그의 마음에 일어났다. 그는 양손으로 잡은 사진틀을 차차 가까이 끄을어당겼다. |
| “여보세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세상의 안해들이 남편에게 바치는 가장 큰 사랑을 나는 당신께 바칩니다. 나는 당신 이전에 사람을 사랑해 본 적이 없읍니다. 나는 내 부모조차 사랑해 본 일이 없읍니다. 처녀의 첫사랑을 곱게 당신께 바쳤읍니다. 그리고 장래에도 절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을 굳게 믿습니다. 내 일생에 내 사랑의 전부를 다만 혼자서 점령하실 당신이외다. 그 대신 내가 당신께 사랑하는 다만 한 가지의 요구는 역시 사랑이외다. 당신이 지금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나는 잘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장래에 허다한 착오와 방해가 생길지라도 당신의 사랑이 그냥 계속되겠읍니까? 나는 이것을 당신께 묻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인형을 사랑할 때에 그 인형에게서 사랑의 보수를 요구하지 않는다 합니다. |
| 그러나 나는 욕심이 많아서 그런지 아이들의 인형을 사랑하는 마음뿐으로 만족치 못하겠읍니다. 내 사랑의 보수로서 꼭 당신의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사랑의 보수로서 사랑이라 하는 것은 그다지 비싼 보수가 아닐 줄 압니다. 이 욕심꾸러기의 여인을 사랑해 주세요. 아니 당신이 사랑하고 싶지 않더라도 나는 꼭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야 말도록 만들겠읍니다. 이것이 내 의무이요, 또한 권리외다.” |
|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현숙이는 몸을 고민하듯이 떨면서 이렇게 호소하였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는 그 눈물을 씻으려도 아니하고 겹지 않고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진의 주인은 현숙이의 호소를 알아 듣겠다는 듯이 온화한 눈으로 현숙이를 바라보았다. 현숙이는 뜻하지 않고 사진을 쓸어안았다. |
| 이때에 그의 머리에는 사 년 전 용언이를 처음 볼 때의 일이 생각났다. |
| 그것은 사 년 전 어떤 봄날이었었다. |
| 친구 몇 사람(일본 여학생)과 작반을 하여 무꼬지마의 사꾸라를 보러 갔다가 돌아오던 길이었었다. 그 가운데서 누구가 오늘 T대학과 W대학의 새에 정구시합 이 (庭球試合) K그라운드에 있는데 구경을 가자는 의논을 꺼내었다. 그 날은 일요일로서 제각기 마음으로 인제 남은 날을 무엇으로 시간을 보낼까 하고 주저하던 중이므로 반대하는 사람이 없이 모두 의견이 일치되었다. |
| 그라운드에서 순서지를 받아서 허리춤에 넣은 뒤에 현숙이가 친구들과 자리를 잡고 앉을 때는 벌써 제일회와 제이회의 예선은 끝난 다음이었었다. |
| 그리고 삼회전의 첫머리로 시작된 경기도 그들이 어느 편이 T대요 어느 편이 W대인지 눈치가 뜨일 때쯤 끝이 낫다. 곁사람들의 비평으로써 현숙이는 이긴 편이 T대학의 부장조(副將組)라는 것을 알았다. |
| 그 다음에 시작된 것이 T대학의 대장조(大將組)와 W대학의 부장조의 경기였었다. 한편은 대장조이요 한편은 부장조인지라 그 기술에 있어서 T대학이 우세한 것은 아무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예상과 틀리게 T 대학의 대장조가 한 게임을 먼저 졌다. 그 뒤부터는 아직껏의 형세가 거꾸로 되었다. 한 게임을 먼저 얻은 W의 부장조는 침착한 태도로 볼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먼저 잃은 T대학조는 좀 덤비기 시작하였다. 대장조가 부장조에 졌다는 면목 없는 사실이 낳은 T대학 대장조의 낭패는 더욱 더 그들로 하여금 실수를 거듭하게 하였다. 더블까지 하였다. 당연히 후위(後衛)가 받을 볼을 전위가 받으려다가 실수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었다. |
| “사나이가 저런 볼에 아께루(開ける ― 구멍을 내다)하다니.” |
| 현숙에게는 벌써 그 승부가 보였다. T대학의 대장조에 대하여 경멸감조차 일어났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