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됐다.’ 그는 안심과 함께 잠깐 얼굴을 붉혔다가 남편을 맞으러 대청으로 나갔다. |
| “늦었지?” |
| 남편은 들어와서 자리에 앉으며 안해에게서 나는 화장의 내음새를 상쾌한 듯이 맡으면서 이렇게 물었다. |
| “아뇨.” |
| 이렇게 대답은 하였지만 현숙이는 남편의 돌아오는 것이 늦었는지 빨랐는지는 생각도 안하였던 바였었다. |
| “영옥인 곧 갔소?” |
| “네 ― 아니, 일성이, 저 우리 동생이 온 뒤에도 좀더 앉았다가 갔으니깐 아마 아홉시 반쯤 갔지요.” |
| “행랑 어멈보고 바래다 주랬소?” |
| 이 뜻밖의 질문에 현숙이는 놀랐다. 마음이 얼굴을 붉혔다. 그러한 사소한 일은 생각지 않을 남편으로서도 넉넉히 주의하는 일을 안해 된 자로서 못하였다 하는 것은 현숙이에게는 부끄러운 일이었었다. 낮과도 달라서 밤에 과년한 처녀를 혼자 보냈다 하는 것은 현숙이의 커다란 실책에 다름없었다. |
| 통상시 같으면 그런 일을 잊을 현숙이가 아니었지만 그때 일성이와의 다툼으로 불유쾌하였던 그는 그만 잊어버렸던 것이었었다. 현숙이는 변명키 전에 솔직하게 자기의 잘못을 남편 앞에 내어놓았다. |
| “미처 생각이 및질 못해서 그만.” |
| “그럼 안 바래다 주었소?” |
| 남편의 물음은 질문이라기보다 힐문에 가까웠다. 그 앞에 현숙이는 조용히 복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네.” |
| 이렇게 대답하고 눈에 온 광채를 모아 가지고 남편을 쳐다보았다. |
| “아직 밤이 깊지 않았기에 마음 놓고 그냥 보냈더니 ― 어디 큰댁까지 잠깐 다녀오리까?” |
| “아니 무슨 일이 있겠다는 게 아니라 아직껏 그렇게 해왔기에 말이오. 게다가 혼자 보내면 어머니께서 좀 부족히 생각하실지두 모르겠구나.” |
| 이 말의 앞에 현숙이는 부끄러움을 느끼기 전에 먼저 감사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편의 그 주의는 남편 자기의 주의라기보다 오히려 어머니와 안해의 새에 어떻게 하면 생길지도 모르는 불만과 부족감을 미전에 방지하려는 그 주의에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안해 된 자가 먼저 깨달아 가지고 일일이 세심한 주의로써 행하여야 할 종류의 일이었었다. |
| “게까지 미처 생각이 돌질 못해서 그만 ― 게다가 일성이도 와 있고―.” |
| “참 그 사람이 왔어. 다시 왜 왔읍디까?” |
| “공연히 왔겠지요.” |
| “영옥이도 봤소?” |
| “네.” |
| “그 사람 뭐? 일성이?” |
| “네, 일성이요.” |
| “일성이와 영옥이와 봤나 말이오.” |
| “한 삼십 분 가량 같이 앉았었지요.” |
| 남편은 다시 그 말에는 응치 않고 담배를 꺼내어서 붙이려 할 적에 행랑어멈이 세숫물 떠다가 놓는 소리가 대청에서 났다. 현숙이는 일어나서 양치기구와 비누와 세수 수건을 남편의 앞에 갖다 놓았다. 그러자 남편이 세수를 하러 나가는 것을 기다려서 자기도 자리를 펴려 침실로 건너갔다. |
| 삼십 년 전에 무장야의 너른 벌판에 아름다운 범나비가 한 마리 떠다니고 있었다 그 범나비가 . 아무 뜻 없이 어떤 동리까지 날아왔다. 그 때문에 어떤 어린아이 하나가 그 범나비를 잡으려다가 그만 참혹히도 죽는 경우에 이르렀다. |
| 그 어린아이가 참혹히 죽기 때문에 나흘 뒤에 어린아이의 아버지가 운전하던 기차가 탈선을 하여 여기서 세계철도사에 다시 볼 수 없는 참극을 이루어 놓았다. |
| 나비의 아무 뜻도 없는 여행은 여기서 무서운 비극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으로 온전히 사건이 끝난 것이 아니었었다. 그때의 그 기차에 조선 대학생 서인준(徐仁俊)이라는 사내와 그의 약혼자 신함라(申咸羅)라는 여자가 있었다. |
|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
| 그동안에 인준이는 미국으로 건너가 있었다. 전니쇼우라는 이름으로서 세계 자연과학계의 상당한 이름까지 얻은 학자가 되었다. |
| 그의 약혼자이던 신함라는 그의 고향 인천서 최모(崔某)라는 의사에게 시집을 갔다. |
| 함라는 왜 인준이를 버리고 최모에게 시집을 갔나. 범나비의 아무 뜻도 없는 여행은 이 서로 사랑하던 두 남녀로 하여금 뜻에 없는 파경의 설움에 울게 하였다. |
| 세상의 온갖 군잡스런 문제를 집어치운 인준이는 오로지 학업에 힘써서 오늘날 서 박사라 하는 명예있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반하여 그의 약혼자이던 신함라는 뜻에 없는 시집을 가서 그 뒤 삼십 년이라는 기다란 세월을 불평과 불만의 가운데서 보냈다. 목숨 있는 인형 ― 천하의 많고 많은 일을 아불관언의 태도로써 그저 죽어지지 않으니 살아간다는 가련한 생활을 계속하는 함라와 ― 아직 독신으로 지내며 세상의 온갖 일을 생각치 않고 오로지 자기의 연구에만 온 힘을 쓰고 있는 인준이의 두 사람 가슴에는(그들의 태도로 미루어) 아직 많은 미련이 남아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 기괴한 운명은 삼십 년 뒤에 그 서인준의 조카 되는 서용언이와 신함라의 딸 되는 최현숙이를 부부라는 명색 아래 연결시켜 놓았다. 젊은 두 남녀는 자기네의 온 존경과 사랑을 상대자에게 주었다. 삼십 년 전에 한 사람에게는 제 삼촌이요 한 사람에겐 제 어머니 되는 사람이 오늘날의 자기네들과 같이 서로 사랑을 속삭였다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하고 신혼인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음식삼아 즐거운 날을 보내고 있었다. |
| ‘태평행’의 첫째날은 막이 열렸다. |
| 삼십 년 동안을 고국에는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고 있던 서 박사에게서 갑자기 귀국한다는 기별이 온 것도 이 날이었었다. 그리고 그 날에 등장한 광대 네 명(용언과 현숙의 부처, 용언의 누이, 현숙의 오라비 일성이)에 대한 생활과 성격과 교양에 대한 윤곽은 비교적 명료히 독자의 머리에 그려졌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특수한 성격을 가진 네 명 밖에 아직도 현숙의 형 인숙이와 어머니 신함라, 용언의 삼촌 서 박사의 세 사람의 중요한 광대는 등장치를 못하였다. 그러면 작자는 이제 장차 전개할 사건을 붓하기 전에 인제 그 세 사람의 생활과 성격의 윤곽을 보여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평범한 속에서 전개되어 나아가는 뜻하지 않은 비극의 씨를 보여 둘 필요가 있다. |
| 이튿날 아침 깬 뒤에는 현숙이는 어젯밤 자기에게 생겼던 불유쾌한 일을 거의 잊었다. 머리 한편 구석에 좀 불유쾌한 감정이 성가시게 붙어 있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의 생활 상태에 변동을 줄 만치 그를 지배치를 못하였다. ‘일성이’라 하는 불유쾌한 기억과 ‘천 원’이라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때때로 그의 마음에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그것뿐이었었다. 충분한 잠을 자고 난 ― 남성적 매력으로서 빛나는 남편이 얼굴은 현숙이로 하여금 온갖 다른 군잡스런 일을 잊게 하는 것이었었다. 예에 의지하여 부처 단 두 사람 새에 간단한 조반을 끝낸 뒤에 남편이 연구소로 가려 할 때에 현숙이는 남편에게 자기는 오늘 언니한테 잠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였다. |
| 다른 때 같으면 자기의 이전의 비밀을 일성이의 입에서 봉하기 위하여 돈을 마련하러 가는 그 인사라 이런 일을 남편의 앞에 천연히 하지 못할 것이었었지만 받았던 커다란 격동은 그로 하여금 아무 어려움이 없이 이 말을 하게 한 것이었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마음에는 형용키 어려운 쓸쓸함이 있었다. |
| ‘당신은 모르시지요? 나는 마음속에 커다란 비밀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외다. 이 비밀을 일생을 품고 있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할 때에 내 마음은 여간 절통치 않습니다. 이 비밀을 당신의 앞에 모두 풀어헤쳐 놓으면 내 마음은 얼마나 시원하겠는지요. 그러나 이 비밀을 당신이 아신 뒤에 당신의 마음속에 당연히 일어날 불유쾌함을 생각할 때는 나는 차마 이것을 당신께 이야기할 수가 없읍니다 . 모든 것을 양해해 주세요. 그리고 용서해 주세요. |
| 나는 당신을 내 온갖 정성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온갖 것을 모두 용서해 주세요.’ |
| “언니한테?” |
| “네.” |
| “언니란 저 창선(昌善)이 언니 말요?” |
| “네.” |
| “갔다 오구료.” |
| 남편은 별일을 다 의논하잔다는 듯이 선선히 승낙을 한 뒤에 연구소로 갔다. |
| 남편을 보낸 뒤에 현숙이는 간단히 설거질을 하고 들어와서 화장대 앞에 마주 앉았다. 열시에서 열두시까지는 자수 강습회, 오후 세시까지는 언니의 집, 그 나머지의 시간을 장보는 것과 가정 안에서의 일로 ― 현숙이의 오늘의 프로그램은 이러하였다. |
| 그러나 화장대에 마주 앉는 순간 그는 어느덧 생각에 잠겨 버렸다. 좀 있다가 당연히 있어야 할 인숙이와 자기와의 문답이며 그 문답에서 또 다시 생겨 날 뒷 문답들을 이리저리 생각하는 동안에 그는 어느덧 화장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영리함과 솔직함을 자기의 가장 큰 무기로 삼고 자랑으로 삼던 그가 어떻게 하면 자기의 언니에게 의심을 받지 않고 천원이라는 돈을 꾸어올는지 그 교묘한 거짓말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궁리를 하고 있는 자기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거짓말을 연구하는 데 대하여 아무 부끄러움이며 미안스럼을 느끼지 않는 자기를 발견하고 오히려 놀랐다. |
| 분병에 손을 대기도 전에 열시가 지났다. 화장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은 때는 벌써 열한시도 지났다. |
| 여기서 그는 자기의 프로그램을 고쳤다. 그리고 자수 강습회는 그만두고 곧 형의 집으로 가기로 방침을 세웠다. |
| 그가 사랑방을 한 번 검분한 뒤에 도배지의 예산을 세우고 어멈에게 부탁을 한 뒤에 형의 집으로 향한 때는 벌써 열두시도 거의 된 때였었다. |
| 현숙이 형 인숙이는 서른한 살이었었다. 스무 살에 어떤 학교 교원에게 시집을 가서 그 이듬해로 한 아들을 보았다. 그 이듬해로는 남편을 잃었다. |
| 사랑의 보금자리에서 아직 그 맛과 자미를 충분히 알고 이해하기 전에 벌써 어머니가 된 그는 안해의 지위에서 어머니의 지위에 올라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지위에 . 올라선 지 며칠이 지나지 못하여 남편을 잃은 그는 또 일전하여 가장의 지위에까지 올라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그의 청춘은 애처로이도 깨어져 버렸다. 아름다운 꿈과 자기자미한 새는 그를 건너뛰었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커다란 짐은 어느덧 그의 어깨에 지워졌다. |
| 그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용감히도 이 쓰고 찬 세상과 싸우려 하였다. |
| 아름다운 꿈이라는 것을 경험하기 전에 벌써 현실의 쓰라림에 부대낀 그는 여기서 자기의 성격을 고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꿈? 그것은 꿈이로다.’ ‘현실? 그것은 분투로다.’ ‘분투? 그것은 즐거움이다.’ 비교적 냉정한 이지를 가지고 있는 그에게는 어느덧 이러한 생각이 움 돋기 시작하였다. 현실은 어디까지든지 분투이며 그 분투에서야만 인생의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그의 이 주의는 어떻게 보면 할 수 없는 그의 경우에서 생겨 난 것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는 자기의 분(分)을 잘 지키고 결코 그 ‘분’ 이상에 올라서 보려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의 남겨놓은 적은 유산으로 자그마한 화장품점을 차려 놓고 시어머니와 아들을 데리고 분투의 일생을 보내려 하였다. |
| 이러한 십 년 동안에 그의 성격에서는 여자다운 온화함은 없어져 버리고 그 대신에 사내로서의 굳셈과 가장으로서의 능함이 생겨 났다. |
|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하늘에 한 사람 땅에 두 사람 합하여 세 사람이라 하였다. 하늘에 있다는 것은 무론 자기의 없은 남편을 가리킴이었었다. 비록 부부생활을 오랫동안은 못하였을망정 그 짧은 동안에 남편에게 바쳤던 그의 사랑은 몹시도 컸었던 것이었었다. 더구나 남편이 없는 이튿날부터 자기와 자기 식구의 입을 위하여 괴로운 세상과 분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은 그는 남편의 죽음을 고요히 조상할 기회도 못 가졌더니만치 그에게 대한 애연한 생각은 더욱 컸던 것이었었다. |
| 땅에 두 사람이란 것은 하나는 제 보배이요 남편의 복사라고 할 만한 외아들 창선이를 가리킴이요 또 하나는 동생인 현숙이를 가리킴이었었다. |



